불교음악의 대중화는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일이었다. 원효대사의 무애가가 일으킨 큰 반향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향악정재라는 새로운 전통으로 이어졌다. 조선조 때에 무애의 창사가 불가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유로 향악정재에서 제외되긴 하였지만 순조 때 새로 창제되게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 정치이념이 바뀌고 사회구조가 바뀌어가면서 불교음악도 빠르게 민간음악에 흡수가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숭유억불의 통치이념이었다. 조선시대의 큰 불교행사로는 우란분재, 수륙재, 연등회가 있었지만 국가적으로 치러진 연등회는 태종, 세종 조에 모두 혁파가 되고 민간의 연등회만 전승 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 성황을 이룬 우란분재 역시 음성적인 행사로 바뀌 었다. 정치권에게 버림받은 불교가 세속화되고 불교문화가 대중화되는 현상은 경제적인 활로를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세속음악으로 변질된 불교음악 중 지금까지 불리고 있는 대표적인 것 중에 회심곡, 남도민요 보렴, 서도창 산염불, 경기민요 탑돌이 같은 것들이 있다. 불교음악의 세속화는 조선 말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데, 사찰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떠돌이 예인 집단인 사당패와 손을 잡거나, 승려들이 직접 탁발 행위를 한 것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선 말기 시장 경제 개념이 커지면서 예인 집단들이 활동할 무대가 많아진 것에도 기인한다. 다양해진 형태의 민간불교음악은 토속음악의 장단이나 토리와 합해져 새로운 전통예술로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은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말기 대표적인 민간불교음악을 정리해 보면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민간불교음악 연희집단은 사당패였다. 사당패는 거사와 사당으로 구성된 반승반속의 남녀 혼성 집단이었는데, 시중에서 염불과 축원을 해주고 시주를 걷어오는 일을 맡아 했다. 두 차례 안거기간 동안에는 이들도 근거지에 모여 기예를 수련하고, 해제 기간에는 연희를 하는 형태로 활동을 하였으나, 남녀혼성과 여사당의 매음 행위 등이 조선의 윤리규범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관리들의 탄압대상이 되어 쇠퇴하게 된다. 이 시기의 사당패의 본거지는 안성 청룡사 였다. 사당패 염불 중 하나가 오늘날 남도 잡가 중 하나인 보렴이다. 보렴은 보시염불의 준말로서 중모리, 굿거리, 자진모리의 전통장단에 육자배기 토리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가사는 축원과 참회게, 사방찬 등 염불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패의 쇠퇴는 탁발승의 탁발염불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가무 기능을 갖춘 승려가 절 밖에 나가 가무를 이용해 시주를 걷어 사찰운영에 필요한 재원으로 썼으나, 이들 또한 관리들의 탄압으로 쇠퇴한다. 현존 가면극 중에 먹중놀이, 상좌춤, 법고춤 등은 탁발승들의 전통이 전승된 것이다. 탁발 염불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회심곡이다. 그러나 시중에서 불리던 회심곡은 세속의 토리로 불린 것이기 때문에 범패 화청의 회심곡과는 그 소리의 특징이 달랐다. 사당패와 굿중패가 쇠퇴하고, 사찰의 운영 수단으로 고용된 것이 절걸립패 였다. 절걸립패는 낭걸립패에서 파생한 것인데, 가가호호 방문을 하며 걸립을 하던 무리였다. 이들이 많이 불렀던 것이 고사염불이다. 오늘날 사물놀이 패의 비나리가 바로 절 걸립패의 고사염불에서 나온 것이다. 이민간에서 활용이 된 불교음악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사적인 면에서는 염불 가사를 전용하지 않고, 민간에서 쓰이던 축원 가사 등이 같이 섞여 있다는 점이고, 가락은 전통 장단과 선율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즉 당시의 민간에서 가장 유행하는 소리의 형태를 빌린 것이다. 오늘날 찬불가가 서양음악 기법을 가장 많이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음악의 특수성을 감안했을 때 무조건적인 대중음악의 차용은 함께 고민을 해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에 의한 주권의 상실은 나라의 기둥이었던 왕가의 몰락을 불러왔다. 왕가의 몰락은 또한 의식음악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 것이었다. 망국과 함께 대한제국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궁중음악을 담당하던 아악대도 이왕직아악부로 개편이 된다. 일제에 의해 아악대의 많은 악공이 해고되었으며 세습제도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대신 궁중음악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만들어진 이왕직아악부에 의해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만이 명맥이 유지되었다. 반면 조선 말 풍류방에서 발생한 정악도 이왕직아악부에 의해 전승이 된 것이 특징이다. 또 민간에서는 권번 기생들에 의해 공연된 예술과 함께 판소리 창극단체나 악극단, 배우협회 등이 등장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궁중음악은 빠른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민간예술 분야에서는 판소리와 산조라는 예술성 높은 음악이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전래민요와는 다르게 작곡자의 창작에 힘입어 만들어진 신민요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음악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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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와 조선시대에서의 찬불가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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